예술가와 친구들
정경연은 1955년 부산 남부민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영도다리 밑 십자당 약국의 약사는 산파로도 유명했는데, 그녀가 정경연을 받았다. 여섯 살까지 부산에서 살다가 부모와 떨어져 서울로 와서 장충동 외갓집에 맡겨졌다.
외할아버지는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1901~1972)이다. 전진한은 경북 상주의 빈농 출신인데 상경한 후 성실성을 인정받아 부산의 백산 안희제 등이 조직한 기미육영회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정경연의 어머니가 장녀였으므로 전진한에게 정경연은 첫 손주였다.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초등생 딸 화장실 청소하도록 특별 부탁
전진한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손녀 정경연에게 자상하게 얘기해주었다.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항일투쟁을 하다 신의주 감옥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른 후 1933년부터 해방될 때까지 10년 이상을 금강산 신계사와 오대산 상원사에서 참선 수행을 한 이야기는 실감이 났다. 밤에 갑자기 경연을 지프에 태우고 서울 시내의 절에 데리고 가는 일이 많았다. 지프 안에는 집으로는 절대 들여놓지 않는 귀한 콜라가 있어 어린 경연은 콜라를 마시는 재미에 따라다녔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외할아버지의 별명은 ‘뽀뽀 할아버지’였다. 법당의 스님들에게 금강경을 강의할 때는 엄숙한 표정의 전혀 다른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전진한은 손녀에게도 항상 존댓말을 했다. “경연이! 이리 와 보세요. 이 꽃을 보아요. 저번에 봤던 꽃이 이리도 많이 자랐어요.” 어린 손녀에게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나이보다 한 해 일찍 장충동의 충무국민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 2학기가 되자 처가살이를 잠시 하던 부친이 청운동에 집을 구해 이사하면서 장충동 시절은 끝났다. 정경연은 수송국민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는 담임에게 그날은 정경연이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특별한 부탁을 했다. 이화여대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중고등학교 때 5년간 동양화를 배웠다. 미술교사는 송수남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굴레방다리에 있는 송수남 화실을 나갔다. 동시에 신촌시장에 있는 하종현의 화실에서 데생을 배웠다.
당연히 순수미술 쪽으로 진학하는 줄 알았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부친이 앞으로는 응용미술이 유망할 터이니 그쪽으로 진학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강원도 고성 출신의 금융인이자 정치인인 부친은 학창시절 미술에 소질이 많았다. 미술을 지망하는 딸의 진로에 적극적이었다. 부랴부랴 서울대 김교만 교수와 홍대의 한도룡 교수에게 가서 응용미술과 입학시험의 필수과목인 구성을 배웠다. 1973년, 홍대 미대에 입학했다.
대학 2학년이던 1974년 12월에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남들보다 매우 이른 결혼이었다. 미 국무성 장학금을 받은 남편은 보스턴으로 유학하기로 되어 있었다.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반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기에 결혼하자마자 아모레 화장품을 생산하던 태평양화학에 취직했다. 이때 해외의 디자인잡지를 많이 보았다. 디자인이 순수미술의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걸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패키지 디자인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용기 디자인을 맡으면서 로고 작업을 했다. 1975년 6월에 태평양화학을 퇴사했다.
미국에 당도했으나 서류가 미비하여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 컬리지 오브 아트’ 입학은 이듬해 1월부터 가능했다. 뉴욕에서 몇 달 동안 디자인 학교에 다니며 여러 전시장을 찾았다. 이때 폴란드 출신의 조각가이자 섬유 예술가인 막달레나 아바카노비치(1930~2017)의 작품을 보고서 감화를 받았다. 섬유미술과 조각이 하나라는 걸 알게 된 건 큰 깨우침이었다. 자신의 진로를 섬유미술로 결정했다.
미국 최초의 주립미술학교인 ‘매사추세츠 컬리지 오브 아트’는 편입하기가 무척 힘든 학교였다. 경쟁률이 80대 1이었다. 대학입시를 위해 열심히 익혔던 구성과 데생 실력에다 대학미전 회화부문과 상공미전에 입선했던 역량으로 무난하게 편입했다. 197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 대학원 과정에 진학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가 있는 미술대학이었다. 약칭으로 리즈디(RISD)라고 불리는 이 학교에는 동양인이라고는 단 세 명밖에 없었다. 일본말을 할 줄 모르는 일본인 3세와 정경연 그리고 학부생으로 윤동구가 있었다.
학교가 있는 프로비던스에서 남편이 있는 보스턴까지는 암트랙(전미 여객 철도)으로 50분 거리였다. 주중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보스턴으로 갔다. 보스턴에는 유학생 등 한인들이 많았는데, 정경연이 반찬을 잘한다는 소문이 났다. 중국배추로 김치를 만들고 당면을 사다가 잡채를 만들었다. 결혼식이 있거나 한인교회에서 파티가 열리면 불고기 20인분 이상의 고기를 재우는 건 정경연의 몫이었다. 한인들의 결혼식 때는 신부의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해주었다. 교민 아이들의 돌날이 오면 돌떡을 쪘다.
부친은 뉴욕에 오면 보스턴의 딸을 불렀다. 미술품에 안목이 높았던 부친은 뉴욕의 싸구려 호텔에 묵으며 아낀 돈으로 김환기의 작품들을 샀다. 서울의 기업인들에게 뉴욕의 김환기 그림을 사라고 권한 것도 부친이었다. 정경연은 김환기의 전속화랑을 방문하며 그 일을 도왔다. 김환기의 그림이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가격이 될 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1979년 5월, 대학원을 졸업했다. 7월 말에 서울로 짐을 부치기 위해 뉴욕 항구로 갔다. 짜장면을 먹으러 뉴욕의 어느 식당에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펼쳐본 미주 한국일보에 홍익대 교수 모집 광고가 났다. 보스턴으로 되돌아가서 성적표 등을 떼어다 홍대로 보내었다. 9월 말 서울에 도착하니 어찌된 셈인지 미국에서 보낸 서류들은 학교에 도착하지 않았다. 1980년 1학기에 홍대에서 강의를 맡았고 2학기에 홍대의 전임강사가 되었다. 너무나 젊은 교수였다. 복학한 입학 동기생은 제자가 되었다.
90년 이응로·서세옥과 시카코 아트 페어
정경연의 어머니는 보스턴의 딸이 일하면서 손이 거칠어질까 걱정되어 목장갑을 왕창 보내어 주었다. 이 목장갑이 나중에는 그녀의 작품 소재이자 주제가 되었다. 정경연 하면 목장갑부터 떠올리는데 알고 보면 정경연의 작품은 섬유에 국한되지 않고 종이, 흙 등으로 무한 확장되는 순수미술의 성격을 더 많이 갖고 있다. 1981년, 백상기념관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도 장갑 작품은 2점뿐이었고 나머지는 종이 등 다른 재료의 작품들이었다.
1984년에 이어 1989년, 동경의 무라마츠 화랑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동경화랑의 다바타 유키히토 대표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1936~2011)과 함께 전시장에 나타났다. 이타미 준은 불쑥 일본 전통가옥에 설치할 작품을 제작해줄 수 있는가를 물었다. 서울로 돌아가 제작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이타미 준이 직접 서울을 방문하여 작품을 가져갔다. 이 일을 계기로 시세이도 화장품회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두 사람의 글이 편지 형식으로 연재되었다.
1988년에는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90년에는 현대화랑 작가로 당시 세계 3대 아트페어였던 시카고 아트페어에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이응로, 서세옥과 함께 참가했다. 두 사람의 그림을 다 합쳐서 석 점뿐인데 정경연의 작품이 부스를 거의 다 덮다시피 했다.
정경연의 법명은 관음행(觀音行)이다. 1985년, 해인사에 가서 삼천배를 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두 시간이나 더 걸려 여덟 시간 반 만에 삼천배를 마치니 컴컴했던 법당에 어느덧 아침 햇살이 훤했다. 성철스님이 법명을 주었다. 관음행. 관음도 힘든데 행까지 하려니 몸이 바쁘다.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새끼손가락 하나가 펴지지 않는다.
정경연은 힘들 때마다 외할아버지 전진한을 떠올린다. 전진한은 자식들에게 일렀다. “남들이 고기 먹을 때 밥 먹고, 남들이 밥 먹을 때 죽 먹고, 남들이 죽 먹을 때 미음 먹으라.” 이 말을 떠올리며 집안의 생래이자 유전으로 관음행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https://n.news.naver.com/article/353/0000051540?sid=103
외할아버지는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1901~1972)이다. 전진한은 경북 상주의 빈농 출신인데 상경한 후 성실성을 인정받아 부산의 백산 안희제 등이 조직한 기미육영회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정경연의 어머니가 장녀였으므로 전진한에게 정경연은 첫 손주였다.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나이보다 한 해 일찍 장충동의 충무국민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 2학기가 되자 처가살이를 잠시 하던 부친이 청운동에 집을 구해 이사하면서 장충동 시절은 끝났다. 정경연은 수송국민학교를 다녔다.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는 담임에게 그날은 정경연이 화장실 청소를 하도록 특별한 부탁을 했다. 이화여대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중고등학교 때 5년간 동양화를 배웠다. 미술교사는 송수남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굴레방다리에 있는 송수남 화실을 나갔다. 동시에 신촌시장에 있는 하종현의 화실에서 데생을 배웠다.
당연히 순수미술 쪽으로 진학하는 줄 알았다. 고교 졸업을 앞두고 부친이 앞으로는 응용미술이 유망할 터이니 그쪽으로 진학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강원도 고성 출신의 금융인이자 정치인인 부친은 학창시절 미술에 소질이 많았다. 미술을 지망하는 딸의 진로에 적극적이었다. 부랴부랴 서울대 김교만 교수와 홍대의 한도룡 교수에게 가서 응용미술과 입학시험의 필수과목인 구성을 배웠다. 1973년, 홍대 미대에 입학했다.
미국에 당도했으나 서류가 미비하여 보스턴에 있는 ‘매사추세츠 컬리지 오브 아트’ 입학은 이듬해 1월부터 가능했다. 뉴욕에서 몇 달 동안 디자인 학교에 다니며 여러 전시장을 찾았다. 이때 폴란드 출신의 조각가이자 섬유 예술가인 막달레나 아바카노비치(1930~2017)의 작품을 보고서 감화를 받았다. 섬유미술과 조각이 하나라는 걸 알게 된 건 큰 깨우침이었다. 자신의 진로를 섬유미술로 결정했다.
미국 최초의 주립미술학교인 ‘매사추세츠 컬리지 오브 아트’는 편입하기가 무척 힘든 학교였다. 경쟁률이 80대 1이었다. 대학입시를 위해 열심히 익혔던 구성과 데생 실력에다 대학미전 회화부문과 상공미전에 입선했던 역량으로 무난하게 편입했다. 1978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 대학원 과정에 진학했다.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가 있는 미술대학이었다. 약칭으로 리즈디(RISD)라고 불리는 이 학교에는 동양인이라고는 단 세 명밖에 없었다. 일본말을 할 줄 모르는 일본인 3세와 정경연 그리고 학부생으로 윤동구가 있었다.
학교가 있는 프로비던스에서 남편이 있는 보스턴까지는 암트랙(전미 여객 철도)으로 50분 거리였다. 주중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보스턴으로 갔다. 보스턴에는 유학생 등 한인들이 많았는데, 정경연이 반찬을 잘한다는 소문이 났다. 중국배추로 김치를 만들고 당면을 사다가 잡채를 만들었다. 결혼식이 있거나 한인교회에서 파티가 열리면 불고기 20인분 이상의 고기를 재우는 건 정경연의 몫이었다. 한인들의 결혼식 때는 신부의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을 해주었다. 교민 아이들의 돌날이 오면 돌떡을 쪘다.
부친은 뉴욕에 오면 보스턴의 딸을 불렀다. 미술품에 안목이 높았던 부친은 뉴욕의 싸구려 호텔에 묵으며 아낀 돈으로 김환기의 작품들을 샀다. 서울의 기업인들에게 뉴욕의 김환기 그림을 사라고 권한 것도 부친이었다. 정경연은 김환기의 전속화랑을 방문하며 그 일을 도왔다. 김환기의 그림이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가격이 될 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1979년 5월, 대학원을 졸업했다. 7월 말에 서울로 짐을 부치기 위해 뉴욕 항구로 갔다. 짜장면을 먹으러 뉴욕의 어느 식당에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펼쳐본 미주 한국일보에 홍익대 교수 모집 광고가 났다. 보스턴으로 되돌아가서 성적표 등을 떼어다 홍대로 보내었다. 9월 말 서울에 도착하니 어찌된 셈인지 미국에서 보낸 서류들은 학교에 도착하지 않았다. 1980년 1학기에 홍대에서 강의를 맡았고 2학기에 홍대의 전임강사가 되었다. 너무나 젊은 교수였다. 복학한 입학 동기생은 제자가 되었다.
1984년에 이어 1989년, 동경의 무라마츠 화랑에서 개인전이 열렸다. 동경화랑의 다바타 유키히토 대표가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1936~2011)과 함께 전시장에 나타났다. 이타미 준은 불쑥 일본 전통가옥에 설치할 작품을 제작해줄 수 있는가를 물었다. 서울로 돌아가 제작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이타미 준이 직접 서울을 방문하여 작품을 가져갔다. 이 일을 계기로 시세이도 화장품회사에서 발간하는 잡지에 두 사람의 글이 편지 형식으로 연재되었다.
1988년에는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90년에는 현대화랑 작가로 당시 세계 3대 아트페어였던 시카고 아트페어에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이응로, 서세옥과 함께 참가했다. 두 사람의 그림을 다 합쳐서 석 점뿐인데 정경연의 작품이 부스를 거의 다 덮다시피 했다.
정경연의 법명은 관음행(觀音行)이다. 1985년, 해인사에 가서 삼천배를 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두 시간이나 더 걸려 여덟 시간 반 만에 삼천배를 마치니 컴컴했던 법당에 어느덧 아침 햇살이 훤했다. 성철스님이 법명을 주었다. 관음행. 관음도 힘든데 행까지 하려니 몸이 바쁘다. 작업을 많이 하다 보니 새끼손가락 하나가 펴지지 않는다.
정경연은 힘들 때마다 외할아버지 전진한을 떠올린다. 전진한은 자식들에게 일렀다. “남들이 고기 먹을 때 밥 먹고, 남들이 밥 먹을 때 죽 먹고, 남들이 죽 먹을 때 미음 먹으라.” 이 말을 떠올리며 집안의 생래이자 유전으로 관음행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한다.